“가난한 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모든 사람을 이해하는 인내의 과정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자활은 곧 자존감의 회복이다.” 지난 22일 봄비가 질퍽하게 내리는 점심 무렵, 종로 낙원상가 뒤편에 있는 서울 꽃 동네 봉사자의 집에서 만난 이해숙 서울 꽃동네 본부장은 노숙자들의 식사와 옷가지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누구를 대하든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그의 표정이 이날따라 무척 밝게 보였다.
걸인들의 안식처인 꽃동네에서 믿음의 사명감으로 시작된 무보수 봉사의 길. 16년째 노숙자들의 대모 역할을 해온 것이 이해숙 봉사자가 걸어온 길이다. 이날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진짜 사랑이 골목 뒤편의 작은 공간에서 그렇게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
그가 맨 처음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충북 음성군 맹동면에 있는 국내 최대 노숙인 장애인시설인 꽃동네 운영자 천주교 오웅진 신부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지난 98년 중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 최초로 학생들과 자신의 자녀들을 데리고 몇 차례 꽃동네에 봉사활동을 갔던 것이 계기가 됐다.
“제 활동을 눈여겨본 오 신부가 ‘꽃동네하고 일했으면 좋겠다’라고 수 차례 저를 설득했지요.그러나 당시 제 생각은 월급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참된 봉사자의 마음이 준비됐을 때 참여 하겠다”라고 약속했습니다.
오 신부와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2010년 무렵, 마침 자녀들이 성장해 국내 로스쿨과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 홀가분하게 봉사자의 길을 걷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오 신부님께 월급을 받지 않고 봉사활동 참여를 약속한 뒤 지금까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수년간 학교 교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쳐온 교직자 이해숙은 교직을 은퇴하고 봉사자의 길을 선택한 인생 2막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월급을 받지 않기 때문에 사명감을 가질 수 있었고, 가장 가난한 사람 한 사람한테 베푸는 선행이 바로 예수님한테 한 것이라는 사명감에 더욱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라고 설명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의식주가 없는 사람]
그 무렵,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누구일까’ 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가장 가난한 사람을 찾아보니,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픈 사람, 옷이 없는 사람, 잠을 자려 해도 잘 공간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의식주가 없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평범하게 살아온 일반사람들에게는 이들의 생활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꽃동네 봉사활동을 통해 알게 됐다.
대다 수 노숙인들은 겉은 멀쩡한데 깊이 들어가 보면 정신적으로 너무 피폐해진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는 대포차, 대포폰, 대포 사장, 빚이 몇억씩 되는 사람, 대포차가 100대도 넘는 사람 등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요. 그렇다고 그 사람들 모두가 저학력자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명문대를 나왔으나 사업하다 망한 사람도 있고, 별의별 사연이 많이 있다.
그래서 생각한 게, “그래, 그렇다면 노숙인을 위해서 뭘 할까? 일단 배고프니까 밥을 줘야 되는 거예요. 근데 저는 밥을 주는 ‘척’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대로 주자. 그리고 정부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부터 우리 힘으로 해보자. 우리 힘으로 하려니까 저도 돈을 내야죠. 우리 애들 3명도 취업하고 나서 매월 6만 원씩 10년째 내고 있어요.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모아서 만든 돈으로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참하는 기업이 생겨났다. 그중 가장 협조적인 기업이 서울시 농수산물공사다. 이들은 절대 현금지원을 하지 않는다. 대신 쌀, 고기 같은 걸 지원해 주고 있어 도움이 크다. 우리 단체가 자랑으로 여기는 것은 정부 지원 받지 않는 단체로, 제대로 된 민간 협력을 이끌어 지금까지 16년 동안 자립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노숙인들의 자존감 회복은 자활의 원동력]
밥을 주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옷 문제를 해결 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숙인들 대다수가 오랫동안 옷을 빨아 입지 않아 그들에게서 풍기는 악취가 주변 사람들을 멀리하게 한다.
이들에게 옷을 마련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서 봉사자들과 함께 여러 단체, 이웃 등을 통해 일주 일에 남자 옷 500개씩 걷었어요. 여자는 남자 옷의 3~4배 많지만, 노숙인의 95%는 남자니까, 남자 옷 걷는 게 정말 어려웠죠. 그걸 3년 동안 매주 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옷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고르게 했고, 이들이 마음에 드는 옷을 가져가니 결국 자신들의 옷이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옷을 빨아 입기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 서울역의 노숙인 옷 문화를 바꿨다고 확신한다. 지금은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분 빼고는 다 깨끗한 옷을 입고 있다.
그렇다면 밥 주고 옷만 주면 끝이냐? 그게 아니라 어떻게든 자활의 힘을 길러주는 게 우리의 목표예요. 그래서 리어카 한 대만 사줘도 사장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리어카(15만 원짜리)를 사주며 계속해서 그분들의 자립을 도와주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리어카를 하나 사주고, 본인도 10만 원을 내고 이런 방식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자활입니다. 월 1회 자활에 대한 교육을 하면서 자활한 분들 얘기를 해주고, 또 한 달에 한 번씩 와서 밥 드시는 분 중에서 자활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리어카를 지원하고 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리어카 장사로 몇 년 동안 살아가는 분들도 생겼다. 그게 참 감사한 일이다.
“자활은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그 사람의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단순히 ‘도와줬다’가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해요. 그게 꽃동네의 정신이자, 제가 지켜나가고 싶은 철학이에요. 우리가 진짜로 돕는다는 건, 누군가가 다시 살아낼 수 있게, 그리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거라고 믿습니다.”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신앙이 없으면 이 일 못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합니다.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힘들 때가 참 많거든요. 그런데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고, 또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저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일 하네”라고만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정말 많은 고민과 희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신앙을 가지면서 느낀 건, 가장 가난한 사람을 향한 사랑은 절대 쉬운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걸 실천하려면, 정말 끊임없이 나를 낮추고, 내 것을 내려놓고, 또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그게 바로 하느님이 주신 사명이라 믿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고 싶습니다.”
의류를 보내는 일은 가나와 케냐 등 해외 빈민들이 많이 있는 국가에도 보내고, 나머지 옷은 새터민, 외국인 근로자, 다문화 가정 등 외국인들을 위해 일하시는 단체들에 드립니다. 선교사나 목사 등,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와도 협력하고 있다. “저의 봉사활동을 이해해 주는 가족에 대한 소개를 해야 되겠네요.
남편과 부부 교사 였던 저의 가족은 자녀 3명을 두고 있습니다. 학교 은퇴 후 건강하게 전원생활을 하는 남편, 큰아이 둘은 각각 변호사와 판사의 직함을 가진 법조인으로 성장했고, 막내는 미국에서 공인회계사(CPA)로 활동하고 있어요. 우리 가족이 행복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한다”라며 감사의 말을 잊지 않는다.
“가족 모두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어 이제는 가족 걱정을 떠나 노후에 마음을 비우고 가장 낮은 자세로 봉사활동을 갖게 돼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 그는 말한다. “남을 진짜로 돕는다는 건, 누군가를 다시 살아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오랜 기간 꽃동네에서 이어지고 있는 ‘무보수 사명’의 길을 말없이 실천하는 그의 모습에서 따뜻한 성자의 흔적이 보인다.
가장 가난한 사람을 위해 뿌린 ‘참된 사랑’의 씨앗이 조용한 열매로 성장하고 있는 모습이 주변에 감동의 울림으로 퍼지고 있다.